(시사기획 창 ‘항명과 복종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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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oreo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5-04-27 09:33본문
(시사기획 창 ‘항명과 복종’
(시사기획 창 ‘항명과 복종’ 중에서)정의로운 항명엔 대가가 따랐다. <녹취>김준철/김오랑추모사업회 사무처장"이 도로로 1km 지점 끝부분이 (옛 특전사) 사령부. 그다음에 약간 남동쪽에는 3공수가 위치했었고 3공수에서 여기까지 거리상으로는 한 7-800m 중간에 보면 언덕 같은 야산이 있거든요." 1979년 12월 12일 밤 이곳에 반란군이 쳐들어왔다.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. 그는 사령관실을 지키고 있었다. 특전사 보안반장이었던 김충립 씨는 반란군이 도착하기 직전 김오랑을 만났다. <인터뷰>김충립 / 전 특전사 보안반장"이쪽에 이제 비서실이야. 이게 김오랑 소령이야. 여기서 (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던 장소는?) 여기. "비서실에 딱 올라가니까 아무도 없고 김오랑 소령님이 혼자 앉았는데 자기 책상에서 7발 탄창에다 권총에다 실탄을 장전하고 있더라고. ‘보안 대장님, 지금 보안사에서 우리를 체포하러 옵니다’ 그러더니 권총을 딱 치고 7발 넣더니 사령관실 문을 들어가더니 문을 딱 잠그는 거야."주변의 회유에도 김오랑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. "그 문에다 대고 한 3명 4명이 계속해서 M16 기준으로 그냥 연발로 들이갈기는 거야. 그냥 한 수백 발 나갔을 거야." 그는 동료들이 쏜 총 여섯 발을 맞고 사망했다. 나이 서른다섯이었다. 신군부는 김오랑 소령이 먼저 총을 쏜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고, 증거 또한 은폐했다. <녹취> 김준철/김오랑추모사업회 사무처장"이튿날 낮에 이 시신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뒷산에 텐트를 치고 거기에 보관을 했다 이거죠." 부대 뒷산에 가매장됐던 김오랑의 시신은 석 달 후에야 현충원에 안장됐다. 김오랑에게 훈장이 추서된 건 무려 35년이 흐른 뒤였다.하지만 전사가 아닌 순직했다는 이유로 보국훈장 추서에 그쳤다.가족들은 고통에 시달렸다. <인터뷰> 김영진/고 김오랑 중령 조카"(아버지가) 서울 갔다 오고 나서 보니까 (술) 됫병, 이거 들고 막 마시고 조금 자고 일어나면 또 들고 마시고. 그런 세상에 살더라니까, 몇 년을. 그러니 나중에 간경화가 와서 돌아가시고..." 부인 백영옥 씨는 남편 사망 후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. 그리고 1991년 돌연 실족사했다. <인터뷰> 김영진/고 김오랑 중령 조카"옥상에 난간이 있어요. 그런데 난간이 이 정도 돼 높이가. 난(시사기획 창 ‘항명과 복종’ 중에서)정의로운 항명엔 대가가 따랐다. <녹취>김준철/김오랑추모사업회 사무처장"이 도로로 1km 지점 끝부분이 (옛 특전사) 사령부. 그다음에 약간 남동쪽에는 3공수가 위치했었고 3공수에서 여기까지 거리상으로는 한 7-800m 중간에 보면 언덕 같은 야산이 있거든요." 1979년 12월 12일 밤 이곳에 반란군이 쳐들어왔다.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. 그는 사령관실을 지키고 있었다. 특전사 보안반장이었던 김충립 씨는 반란군이 도착하기 직전 김오랑을 만났다. <인터뷰>김충립 / 전 특전사 보안반장"이쪽에 이제 비서실이야. 이게 김오랑 소령이야. 여기서 (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던 장소는?) 여기. "비서실에 딱 올라가니까 아무도 없고 김오랑 소령님이 혼자 앉았는데 자기 책상에서 7발 탄창에다 권총에다 실탄을 장전하고 있더라고. ‘보안 대장님, 지금 보안사에서 우리를 체포하러 옵니다’ 그러더니 권총을 딱 치고 7발 넣더니 사령관실 문을 들어가더니 문을 딱 잠그는 거야."주변의 회유에도 김오랑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. "그 문에다 대고 한 3명 4명이 계속해서 M16 기준으로 그냥 연발로 들이갈기는 거야. 그냥 한 수백 발 나갔을 거야." 그는 동료들이 쏜 총 여섯 발을 맞고 사망했다. 나이 서른다섯이었다. 신군부는 김오랑 소령이 먼저 총을 쏜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고, 증거 또한 은폐했다. <녹취> 김준철/김오랑추모사업회 사무처장"이튿날 낮에 이 시신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뒷산에 텐트를 치고 거기에 보관을 했다 이거죠." 부대 뒷산에 가매장됐던 김오랑의 시신은 석 달 후에야 현충원에 안장됐다. 김오랑에게 훈장이 추서된 건 무려 35년이 흐른 뒤였다.하지만 전사가 아닌 순직했다는 이유로 보국훈장 추서에 그쳤다.가족들은 고통에 시달렸다. <인터뷰> 김영진/고 김오랑 중령 조카"(아버지가) 서울 갔다 오고 나서 보니까 (술) 됫병, 이거 들고 막 마시고 조금 자고 일어나면 또 들고 마시고. 그런 세상에 살더라니까, 몇 년을. 그러니 나중에 간경화가 와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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